아라비아 숫자는 왜 인도에서 시작됐고 어떻게 유럽에 퍼졌을까

아라비아 숫자는 왜 인도에서 시작됐고 어떻게 유럽에 퍼졌을까

Muslim Post Editorial Desk@muslimpost

인도의 십진 자리값과 0에서 아랍어 산술, 알콰리즈미, 976년 유럽 필사본과 피보나치까지, 숫자의 이름·형태·보급 시기를 구분한다.

매일 쓰는 0부터 9까지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유럽의 독자들이 아랍어로 연구되고 설명된 계산법을 중요한 경로로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진 자리값과 0에 관한 핵심적인 발전은 그보다 앞선 인도 수학 전통에 있습니다. 기호의 모양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유럽 사람들이 모두 한날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숫자 역사 개설은 인도에서 아랍어권을 거쳐 유럽에 이르는 경로가 단순한 한 번의 전달이 아니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름, 발명, 전파, 일상 사용은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976년에 스페인에서 베껴 쓴 필사본에는 인도계 숫자가 나타나지만 피보나치의 유명한 산술서는 1202년에 쓰였습니다. 앞선 것은 한 문헌에 기호가 보인다는 증거이고 뒤의 것은 계산법을 가르치는 저술입니다. 어느 쪽도 그해부터 유럽 전체의 장부가 한꺼번에 바뀌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아라비아’라는 이름과 ‘인도’라는 기원을 모순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표지 이미지는 AI의 도움으로 제작한 독창적인 역사 재구성입니다. 현존하는 특정 필사본, 공방, 유적 또는 인물의 만남을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숫자의 이름과 숫자의 발명은 같은 문제일까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아라비아’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유럽 언어에서 굳어진 역사적 명칭입니다. 그 명칭은 아랍어 저술과 그 뒤의 라틴어 전승을 통해 계산법을 배운 중요한 구간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인도의 자리값 표기와 0의 발전, 아랍어권 학자들의 설명, 유럽 필사본과 교육 현장에서의 채택은 각각 다른 구간입니다. ‘인도-아라비아 숫자’라는 표현은 앞선 인도 발전과 뒤이은 전달을 함께 떠올리게 하지만 기호가 이동하는 동안 언제나 같은 선 모양을 유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선 507이라는 수 자체와 그것을 적는 5, 0, 7이라는 기호를 분리해야 합니다. 507은 다른 문자로 적어도 같은 수량입니다. 반면 5를 어떻게 그리는지는 필사한 사람의 지역, 시대, 도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리값’은 같은 5가 백의 자리에서는 오백, 십의 자리에서는 오십을 뜻하도록 하는 규칙입니다. 어떤 오래된 종이에서 익숙해 보이는 숫자 아홉 개를 찾았다고 해서 그 필경사가 0을 어떻게 썼고 어떤 계산 규칙을 적용했는지까지 자동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에서 여러 계산법이 동시에 쓰였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개설은 아랍어권에서 손가락으로 셈하는 방식, 문자로 수를 표시하는 방식, 60진법과 인도에서 유래한 십진법이 다양한 용도로 공존했다고 설명합니다. 새로운 산술서를 읽은 학자가 있다고 해도 상인의 장부, 관청의 문서, 천문 표가 같은 날 똑같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각 자료를 볼 때는 작성 장소와 연대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 계산의 도구인지, 수업에 쓰인 책인지, 결과를 적은 기록인지까지 살펴야 합니다.

자리값과 0은 계산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507에서 5는 오백을 뜻하지만 57에서는 오십을 뜻합니다. 같은 기호라도 위치가 달라지면 값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507의 가운데 0은 십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보존합니다. 그것을 빼면 오백칠을 쉰일곱과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이처럼 빈자리를 표시하는 0과 ‘7에서 7을 빼면 0’이라고 말할 때 계산 결과가 되는 0은 연결돼 있지만 동일한 역사적 질문은 아닙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0 역사도 자리 표시와 0을 수로 다루는 규칙을 구별합니다.

자리값을 사용하면 소수의 기호를 되풀이해 큰 수를 적을 수 있고, 올림이나 내림을 일정한 순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507과 26을 더하면 일의 자리에서 7과 6을 더해 13을 얻고 3을 적으며 하나를 십의 자리로 올립니다. 그 자리에서는 0과 2에 올림 1을 더해 3이 됩니다. 백의 자리에 남은 5와 합치면 답은 533입니다. 이 예시는 현대 독자에게 원리를 보여주는 설명이지 9세기 필사본에 정확히 같은 글꼴과 세로셈의 배열이 있었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옛 계산에는 가루나 모래를 깐 판에 기호를 쓰고 필요할 때 지우거나 옮기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이런 판은 중간 단계를 바꾸기 편하지만 지워진 단계가 종이 문서처럼 남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남아 있는 책의 모양만 보고 당시 사람들이 모두 같은 도구를 썼다고 추론할 수 없습니다. ‘0의 발명자’를 묻기 전에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빈자리를 메우는 점이나 동그라미, 0을 포함하는 연산 규칙, 오늘날의 숫자 글꼴은 서로 다른 증거로 따져야 합니다.

인도의 수학책과 괄리오르 비문이 보여주는 범위

브라흐마굽타는 628년에 쓴 『브라흐마스푸타싯단타』에서 0과 양수·음수를 다루는 규칙을 제시했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인물 자료는 그의 작업이 중요하다고 평가하면서도 0으로 나누는 문제에 대한 당시의 설명은 현대 산술과 맞지 않는다고 짚습니다. 중요한 수학적 문헌을 존중하는 것과 그것이 오늘날의 모든 규칙을 이미 완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책의 집필 연도 역시 사람들 머릿속에 관련 개념이 처음 생겨난 날짜로 바꿀 수 없습니다.

876년 괄리오르의 비문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0 기호의 사용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돌에 새겨진 표시가 어느 장소에서 어느 시점에 사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에 글을 새긴 날이 곧 0을 발명한 날은 아닙니다. 더 오래된 흔적이 보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른 재료를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 연구에서 ‘현재 볼 수 있고 날짜를 알 수 있는 사례’와 ‘인류 최초의 착상’은 원래 다른 개념입니다.

서로 다른 자료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합니다. 수학책은 규칙을 문장으로 설명하고 비문은 특정 장소의 기록을 물체로 남깁니다. 한 지역의 기호를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밖의 모든 지역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필기했거나 같은 산술법을 학교에서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날짜뿐 아니라 자료의 용도, 필기 방식, 보존 상태를 함께 봐야 합니다. 이런 구분 없이 가장 오래된 숫자 사진 하나를 모든 계산 관행의 시작으로 삼으면 역사적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게 됩니다.

바크샬리 필사본의 ‘가장 오래된 0’은 왜 논쟁일까

옥스퍼드가 보관하는 바크샬리 필사본에는 숫자 안에 점이 쓰인 예가 있습니다. 보들리 도서관의 2017년 발표는 여러 자작나무 껍질 조각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실시했고 일부 조각에서 예상보다 이른 시기를 제시했습니다. 도서관은 이를 초기 0 기호의 역사와 연결해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실험에서 직접 측정한 것은 글자가 적힌 재료의 연대입니다. 나무껍질이 만들어진 때와 그 위에 글씨가 기록된 때는 반드시 같지 않고 여러 잎이 한 번에 필사됐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Kim Plofker를 비롯한 다섯 연구자의 논문은 가장 오래된 껍질의 연대를 필사본 전체의 작성 연대로 옮기는 추론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점이 계산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도 다시 살폈습니다. 이 논쟁은 ‘박물관 발표가 맞다’ 또는 ‘모든 측정이 틀렸다’라는 식으로 줄일 수 없습니다. 측정치 자체, 문헌의 필사 시기, 수학 기호의 기능이 각각 다른 단계의 판단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세계 최초의 0’이라는 제목을 볼 때는 어떤 재료를 측정했는지, 점을 자리 표시로 보는지 연산에 참여하는 수로 보는지, 표기된 날짜가 어떤 대상의 연대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브라흐마굽타의 책은 연산 규칙, 괄리오르 비문은 연대가 분명한 사용 사례, 바크샬리 필사본은 재료와 기록 사이의 간격을 검토하게 합니다. 세 자료를 같은 종류의 증거인 것처럼 순위를 매기면 오히려 각각이 알려 주는 중요한 사실을 놓칩니다.

알콰리즈미의 산술서와 대수학서는 어떻게 다를까

9세기의 알콰리즈미는 인도식 계산을 아랍어로 설명한 저술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 아랍어 산술 원문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뒤에 전해진 라틴어 문헌은 유럽에서 관련 지식을 배운 경로를 보여주지만 원작에서 바뀐 부분도 있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전승사는 아랍어 원래 제목도 확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틴어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알콰리즈미의 직접 발언처럼 인용하거나 현재의 열 개 숫자 모양을 그가 처음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대수학 책은 인도식 숫자를 다루는 산술 전승과 별개의 저술입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알콰리즈미 전기는 두 저술을 분리해 설명합니다. 그의 이름이 라틴어로 옮겨지며 나중에 ‘알고리즘’과 관련된 말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이전에 아무도 순서에 따라 계산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일과 그 사람이 숫자를 발명했는지는 따로 따져야 합니다.

762년 바그다드 건설의 역사는 아바스 왕조의 도시와 뒤이은 학문 활동을 이해하는 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연대가 곧 잃어버린 산술서의 작성일이나 숫자의 최초 전파일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은 필사, 강의, 독서, 권위를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전해졌습니다. 이자가를 통한 교수와 전승은 그 배경을 설명할 수 있으나 어떤 수학 필사본이 인도에서 유럽까지 간 구체적 경로의 직접 자료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아랍어권의 동쪽과 서쪽에서 숫자 모양은 같았을까

같지 않았습니다. 인도계 계산법이 퍼지면서도 각 지역의 필경사는 숫자 기호를 다르게 그렸습니다. 아랍어권 서부에서 발전한 형태는 나중에 서유럽에서 친숙해진 0부터 9까지의 모습과 관계가 깊습니다. 동부의 형태 역시 오랫동안 별도로 사용됐습니다. 기호의 바깥모양이 달라도 백의 자리, 십의 자리, 일의 자리로 수를 읽는 원칙은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오늘날 글꼴을 모든 시대의 아랍어 문헌에 그대로 투영해서는 안 됩니다.

영국박물관의 오스만 시대 나침반 겸 해시계에는 동부 아라비아 숫자로 적힌 시간 눈금이 기록돼 있습니다. 박물관이 제시한 제작 연도는 1582~1583년입니다. 이 물건은 후대의 실제 기구에서 다른 숫자 모양을 확인하게 하지만 9세기에 누가 어떤 기호를 처음 만들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물체가 아름답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로 그보다 수백 년 전의 필사본을 대신하는 증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는 숫자의 꺾인 모서리 수가 표시하는 값과 일치하도록 처음부터 설계됐다는 그림도 돌아다닙니다. 이 글에서 검토한 연대가 있는 문헌과 박물관 자료에서는 옛 기호에서 그 현대적 도형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숫자를 원하는 모양으로 다시 그려서 우연히 같은 모서리 수를 만드는 일과 옛 필경사가 실제로 그런 원칙을 따랐다는 주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숫자의 형태 변화를 말하려면 물건마다 시기와 장소, 필기 관행과 연결 고리를 차근차근 보여줘야 합니다.

유럽은 피보나치보다 먼저 숫자를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역사 개설은 976년 스페인에서 필사된 『코덱스 비질라누스』에 인도에서 유래한 숫자가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적어도 그 문헌의 필경사가 기호를 남겼다는 증거입니다. 그해의 모든 유럽 상인이 같은 숫자로 거래 장부를 썼다는 근거는 아닙니다. 아랍어 문헌에 관련된 라틴어 자료, 여러 곳의 교사와 학생, 지중해권의 접촉은 그 후에도 다른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계산법을 소개했습니다.

피사의 레오나르도, 곧 피보나치는 1202년 『산반서』에서 인도계 숫자와 계산법을 설명했고 1228년에 책을 개정했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피보나치 전기는 그의 배움과 실용적 문제를 다룬 저술을 소개합니다. 거래와 계산에 유용한 방법을 가르친 공헌은 크지만 976년의 앞선 필사본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를 유럽에서 숫자를 처음 본 사람이라고 하거나 1202년을 전 유럽의 즉각적인 전환일로 쓰면 서로 다른 종류의 증거를 혼동하게 됩니다.

더 늦은 시기의 고노르드어 Algorismus 필사본 연구는 자리값과 연산을 가르치는 글에도 수량을 말로 쓰거나 로마 숫자로 적는 방식이 함께 남았음을 보여 줍니다. 14세기의 GKS 1812 4to에는 인도-아라비아 기호가 일부 나타나지만 모든 표기가 새 기호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이는 계산법을 배운다는 것과 옛 표기법을 한 번에 버린다는 것이 다른 일임을 말해 줍니다. 물론 이 자료만으로 아이슬란드의 필경사가 피보나치에게 직접 배웠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천문학 역시 세밀한 계산을 필요로 했습니다. 알바타니의 관측과 삼각법은 수학적 계산의 과학적 맥락을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한 특정 관측이 0부터 9까지를 처음 유럽으로 옮겼다는 증거로 바꾸면 안 됩니다. 오늘날 2027년 라마단 날짜를 계획하는 안내를 볼 때도 계산으로 예상한 날짜와 지역 사회의 실제 초승달 관측 발표를 나눠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현대의 계산과 관측이 다른 문제라는 확장 사례일 뿐 중세 숫자 전파의 사료가 아닙니다.

‘교회가 0을 악마의 표시로 금지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

새 숫자가 천천히 확산한 이유를 설명한다며 유럽의 교회가 0을 악마의 표시라고 불러 곳곳에서 전면 금지했다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수학사 연구자 C. Philipp E. Nothaft의 연구는 이 이야기의 출처를 추적해 널리 적용된 금지 명령과 ‘악마의 0’이라는 묘사에 신뢰할 만한 역사 자료가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후대에 만든 서사를 당시의 모든 교사, 상인, 성직자가 공유한 생각처럼 적는 일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도시나 조직에도 장부를 쓰는 지역 규칙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규칙을 논하려면 실제 문구와 날짜, 누구에게 적용됐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익숙한 계산판을 쓰는 습관, 서기 교육, 기록 재료의 비용, 지우거나 고치기 쉬운 표기 방식 등도 새로운 방법의 채택 속도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도시의 기록을 유럽 전체의 보편적인 종교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은 별도의 광범위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인도의 자리값과 0은 중요한 바탕이었고 아랍어 산술 연구와 라틴어 교육은 전파에 참여했으며 유럽의 실제 사용은 여러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군가 ‘최초의 숫자’ 또는 ‘0의 발명자’를 말하면 먼저 그것이 나무껍질의 연대인지, 돌에 남은 기호인지, 산술 규칙인지, 필사본에 보이는 글자인지, 일상 장부의 보급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한 사람에게 모든 역할을 돌리는 간단한 이야기보다 자료에 맞는 답을 줍니다.

자료 출처